대기실에서 걸어 나오는 저 사람은 '안나' 속 현주인가 아니면 배우 정은채(34)인가. 본격 인터뷰 전 등장하는 정은채에게 기자가 말을 건네자, 담담하던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정은채가 출연한 쿠팡플레이 시즌 '안나'는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정은채는 극중 현주 역을 맡아 생동감 넘치는 천진난만함부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서늘함을 오가며, 폭넓은 연기를 보여줘 호평 받고 있다."작품이 대중에 어떻게 보여질 지 모르니까, (시청자 반응은)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제일 기대되고 궁금한 지점인데 오픈되고 나서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지금 기분은 너무 좋아요. 제가 부산 출신이라, 개인적인 연락이 지방(의 지인)에서부터 올라오면 꽤 괜찮은 거라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데 이번엔 꽤 그렇더라고요. 재미있게 봐주시고 있구나 생각해요."
최근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 만난 정은채는 '안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작품 속에서 펼쳐보인 열연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픽'한 이 문제적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안나'는 정은채가 4년 여 전 만난 시나리오였다. 당시 느낀 시나리오의 첫인상에 대해 묻자 정은채는 "그 시기 읽은 시나리오 중 단연 가장 돋보였다"고 주저없이 말했다. 그는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읽혔고, 마지막까지 덮고 나서 '이 작품은 꼭 나와야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작품에 대한 확신을 보였다.
정은채는 처음부터 '현주' 역으로 제안을 받았다. 현주는 극중 유미(수지 분)의 전 직장상사이자 태생부터 우월한 갤러리 대표로, 극중에서는 남의 눈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무대뽀에, 자신이 부유층임을 넘어서 애초에 계급적으로 타인에 비해 우월하다는 그릇된 의식에 사로잡혀 시종일관 안하무인적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인물이다.
유미의 서사가 주로 그려진 '안나' 1, 2회에서는 현주의 이런 캐릭터가 극대화돼 표현되며 유미의 대척점에 섰기에, 단편적인 구도로 봤을 때 악역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제작발표회에서부터 정은채는 "현주는 악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묻자 "이 인물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현주가 악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접근했어요. 유미도 그렇고 여기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양면성이 있고, 다면적인, 인간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하나씩은 다 갖고 있고 현주 역시 그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에 있어서 캐릭터의 힘이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좀 밀어붙이는, 자기 확신이 있는 캐릭터라 이 인물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단순히 악역이라 생각했다면 작품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줘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극에 잘 먹혔다면 그건 성공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너무 좋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극중 현주는 정은채조차도 "살면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런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정은채는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는 "얄밉기도 하고, 우리가 살면서는 그리 마주하고 싶지 않은 캐릭터이지 않나. 그 부분을 함께 가지고 가면서도 익살스럽고 재치 있는 면모가 있어야 캐릭터가 살 거고, 누군가에게는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밸런스를 맞추는 데 신경썼다"고 말했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느낌을 묻자 "짜릿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때로는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시청자들도 그런 면에서, 저렇게 마음 속에 담지 않고 저렇게 자기 기분대로 자기 마음을 직선적으로 내뱉을 수 있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시는 것 같기도 했고, 나 역시 연기하면서 모든 걸 해소하면서 연기한 적이 없어서 그런 면에서는 짜릿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정은채가 선을 넘었다고 느낀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처음부터 선은 넘었다고 봐요. 그런데, 그걸 하나하나 이해해서는 절대 이 캐릭터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현장에서는 전혀 갖지 않고 연기했어요. 그래야만 둘 사이의 감정이 산다고 생각했죠."
자신의 인생을 훔쳐 산 안나의 삶을 살아온 유미에게 격노하는 장면에 대해서도 돌아봤다.
"사실 현장에선 '과하지가 않은데? 너무 합리적인데?' 이런 얘기를 많이 주고받았어요. 현주가 유미에게 한 말들이, 이 사람을 응징하고자 하는 것보단 이 페이스도 내 것으로 만드는 현주의 캐릭터였기 때문에, 너무 현주다운 제안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게 수용되면, 이 사람(현주)은 뒤끝도 없는 캐릭터라, 자신을 사칭한 유미의 사기도 용서할 수 있는 캐릭터였어요. 그런 부분이 현주의 아쌀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과하지 않고, 충분한 신이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캐릭터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도 덧붙였다. "저는 현주가 처음부터 귀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주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오히려 자기만 보고,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캐릭터는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장면은 정말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했어요. 딸에 대한 모성애가 드러났을 때는 비로소 '이 인간도 마찬가지로 너무 평범한 그런 인물이구나' 하는 걸 보여줬는데, 그런 장면이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만든 것 같아요."
자칫 단면적이고 보편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캐릭터지만, 정은채는 현주를 뻔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저는 현주가 재미있었던 게, 직설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기는 하나 때로는 혼잣말을 할 때 굉장히 자조적인 대사를 내뱉고, 뭔가 허무하고 허망함을 뱉을 때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는 이 사람을 조금 더 다각도로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고, 이 캐릭터를 연기할 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현주를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고자 한 열망이었다. 정은채가 초반부와 후반부 연기톤을 다르게 잡아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현주가 등장한 장면들은 거의 현주가 리드하는 장면인데, 초반에는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 해맑고 안하무인의 들떠있는 연기 톤을 보여줬다면, 후반부에서는 훨씬 더 내적으로 파고드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상황을 맞닥뜨려야 하는 장면들이 많아서 표정도 훨씬 무거워지고 톤도 많이 다운시켜 했던 기억이 있어요. 세월이 흐른 것도 염두에 뒀어요. 그 사람의 기본 본성은 남아있겠지만, 세월 속에서 변화된 지점이 있었을 것이고 그 톤의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금 더 눈이, 초반부에는 뭐가 비어있는 듯한 눈빛이라면 후반부에는 영혼을 많이 끌고 와서, 내 눈 안에 이야기를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감독님은 완벽주의자인 것 같아요. 연출에는 사실 너무 많은 것들이 내포돼 있잖아요. 현장에서 지휘자 같은 모습도 있어야 하고, 작은 미세한 것도 캐치해야 하는 게 있고. 정말 섬세하고 예민하신 분이셨어요. 본인이 그리고 싶은 게 확고하셔서 오히려 그런 고집스러운 면이 연출에 잘 드러났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의 색깔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극중 현주가 미술 전공자라는 설정이나 영어를 사용한 장면들도 이주영 감독표 디테일이었단다. 그는 "감독님이 살려주신 디테일인 거 같다. 나도 미술을 공부했었고 영국에 있었던 걸 조금 더 부각되게 설정해주신 것 같다"고 했다.
수지와의 호흡은 어땠을까. 정은채는 "수지와의 신이 많았는데, 거의 수지 씨는 대사가 없었고 거의 내가 주도하는 대화에서의 리액션을 취하는 연기였다"며 "다양한 리액션이 나오게 하기 위해 나 혼자 이리 찔러보고 저리 찔러보고, 준비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독님이 '유미가 현주를 만났을 때 리액션이 너무 다르고 좋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주고받는 대사가 서로 교감하는 장면들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가까이서 지켜본 배우 수지에 대해서는 "시청자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익숙하던 모습에서 좀 비껴가는 걸 보면서 느끼는 짜릿함이 있는데, 수지가 이번에 '안나'를 선택한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며 "앞으로가 더 궁금해지는 배우"라고 인정했다.
"고민이 많지만 이 작품이 나에게 오고 이 캐릭터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그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은 결국, 작품의 감독님이고 지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눈을 믿는 편이고,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좀 더 몸을 던지는 편인 것 같아요."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 정은채의 강점은 무엇일까. 잠시 망설이던 정은채는 "충성심?"이라며 까르르 웃었다.
"저는 어쨌든, '안나'에서도 프로덕션 단계에서 감독님이 저를 인간적으로 좋아해주시고 배우로서 믿어주셨어요. 그런 사랑과 지지를 받으면, 돌려드려야죠. 그것에 대해선 확신이 있고, 그러려고 최선을 다하는 편이에요. 그게 저의, 가진 건 없지만 유일한 장점이지 않을까 싶어요."
인터뷰 말미 정은채는 2010년 영화 '초능력자'로 데뷔, '배우 정은채'로 달려온 10년 넘는 시간을 담담히 떠올리기도 했다.
"시간이 되게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면서, 10년이라고 하면 와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나 싶기도 해요.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의 선택은 아니기에 부지런히 좋은 작품들을 운명적으로 잘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박세연 스타투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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